만종초등학교 명신분교 1964-1988

1964. 05. 14 만종초등학교 명신분교 개교
1971. 10. 08 신축교사 낙성식
1971. 12. 13 육영수 여사 어린이 문고 기증
1984. 12. 21 동신운수주식회사와 자매결연

1988. 03. 01 만종초등학교와 통합 폐교

강원아카이브 승인 2021.01.07 19:45 의견 0

만종초등학교 명신분교

다름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마을, 대명원에 세워진 학교

1964년 개교한 명신분교는 한국전쟁이 끝난 후 한센병에 걸린 제대군인들을 중심으로 호저면 만종 3리에 형성된 대명원 정착촌에 세워진 학교이다. 지금은 한센인에 대한 편견이 없어진지 오래되었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한센인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과 차별의 이름으로 존재했던 공동체 학교였다. 한센인 정착촌인 대명원 주민들의 자녀들은 외부 일반 사회로부터 배제되어 농장 내에 분교를 지을 수 밖에 없었다. 1964년 개교한 명신분교는 한센인 아이들과 공학을 반대하는 일반 학부모들과의 분쟁으로 인해 설립된 학교로 1988년 만종초등학교에 통합, 폐교 되었다. 명신분교는 1971년 12월, 육영수 여사로부터 어린이 문고를 기증받기도 했으며 1974년에는 체신부 장관 표창과 강원도 교육감 표창을 수상하기도 했다. 명신분교의 역사는 만종초등학교에 남아있는 앨범 외에 개인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명신분교 1970년대

대명농원의 시작

정부는 1953년 11월 1일 대통령령 제829호로 국립대명구호병원의 설립을 공포했다.이듬해인 1954년에는 대명원에 한센인들의 치료를 위한 강원도지부가 이곳에 설치되었고 한국의 슈바이쳐라 불리는 ‘고 문창모 박사’가 대명원의 책임자가 되어 이들을 보살피며 정신적 지주가 되어 주기도 했다. 대명원 정착촌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60년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조성되었다. 당시에는 한센인들을 바라보는 편견과 차별적 시선으로 그들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주고 마을과의 왕래도 거의 없었으며 일반인과 격리된 채 생활해야 했다. 때문에 한센인들은 피해의식을 느끼면서 그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경제력을 크게 키워 지역 경제에 영향력을 끼칠 정도였다.

대명원 2017

1970년대 까지만 해도 110세대 180여명이 자활 활동을 했으며, 면적은 56만㎡로 주택 145동, 축사 350동으로 2만 여수의 양계와 150여두의 돼지, 소 등 가축사육을 주업으로 삼아 생활했다. 특히,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대명원의 생산품을 군납할 수 있도록 해서 안정된 생활을 하기도 했다. 현재 대명원은 재개발사업이 추진되고 있는 지역으로 대부분의 주민들은 떠나고 남아있는 주민들은 그리 많지 않다.

(참고자료: 한센인 피해사건 진상조사 연구용역 보고서 2010-2011, 보건복지부)

명신분교 운동회 1970년대

이ㅇㅇ(82)

1964년 대명농원 내에 설립된 명신분교는 한센인의 아이들을 위해 지어진 학교다. 당시 바로 옆에 있는 만종초등학교의 학부모들은 한센인의 아이들과 함께 교육을 시키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미감아(감염이 안되는 아이)라 해도 뿌리 깊게 박혀있는 한센병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이 아이들을 학교에서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대명원 주민들은 중학교, 고등학교를 보낼 때 이곳에 사는 아이들이 아닌 것으로 속여서 보낼 수 밖에 었었다. 학교를 보낼 수가 없는 상황이다 보니 한센인들 만을 위해 설립된 고아원에 보내서 학교를 다니게 하고 또는 큰집에 양자로 보내서 공부를 가르쳐야만 했다.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마을 앞에서 버스를 내리지 않고 다른 곳에서 내려 걸어오는 일도 있었다.

명신분교 운동회

1960년대 중반부터 일반 학교에 보내려는 정착촌 주민들과 입학을 반대하는 지역 주민들이 충돌하는 사건이 전국적으로 격렬하게 일어났다. 이처럼 한센인 자녀 취학과 관련한 분쟁들은 교육청에 의해 중재가 되어 학교를 다닌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정착촌 내에 분교를 설립해 문제를 해결했다. 명신분교도 그런 사회적 분쟁의 과정에서 설립된 학교였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한센인에 대한 많은 관심과 지원이 있었다. 정착촌 내에 학교를 짓는 과정에도 육여사의 도움이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학교를 지은 후에는 육영수 여사의 이름으로 어린이 도서도 전달되고 했다. 이곳 주민들은 육영수 여사에 대한 고마움을 깊이 간직하고 있다. 정착촌에서 생산된 양계, 양돈제품을 논산훈련소 같은 곳에 군납할 수 있도록 해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해 마다 열리는 육영수 여사 추모식(8.15)에는 마을의 많은 한센인들이 찾아간다.

육영수 여사 어린이문고 기증 1971년

명신분교는 지금의 대명장로교회 자리에서 간이교실을 만들어 2년 정도 복식수업을 한 것이 그 시작이라 할 수 있다. 그 후 현재 하늘원장례식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대명농원의 부지를 교육청에 희사해서 정식으로 명신분교를 개교하게 되었다. 개교할 때에는 분교장 1명에 교사 4명이 학생들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학생들이 많을 때는 140여명 까지 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대명원에는 100여 가구 이상의 주민이 정착해서 살고 있었으니 한집에 1~2명 씩의 자녀들은 기본으로 있었다. 명신분교는 7~8개의 교실로 지어졌고 학생수도 100명 이상이 되니까 운동회도 자체적으로 했다. 학교를 보내면서도 아이들의 미래가 가장 큰 걱정이었다. 그 후 분교가 폐교 될 때 쯤에는 사회적으로 인식이 변하고 차별도 없어졌다.

명신분교 자활육계교육 1970년대
명신분교 운동회 성화봉송 1970년대



기록하는사람

강원아카이브

저작권자 ⓒ한국아카이브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